EUV 장비 가격 2,000억 | 비싼 건 렌즈가 아니라 빛을 만드는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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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V 노광장비 한 대는 2026년 8월 기준 약 2,000억 원, 차세대 High-NA 모델은 4,000억 원을 넘습니다. 이 값에서 가장 큰 덩어리는 렌즈나 정밀 스테이지가 아니라 빛을 만드는 광원 모듈이며, 시장조사기관 집계로 EUV 리소그래피 구성의 46.3%를 차지합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13.5나노미터 파장의 빛은 자연에서 가져올 수 없어 매번 새로 만들어야 합니다. 왜 이 가격이 계속 오르나 스캐너 가격은 2020년에서 2022년 사이에만 22% 올랐습니다. 수요가 몰리는데 연간 생산 대수가 30~45대 수준에 묶여 있는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세대가 바뀔 때마다 두 배씩 뛰는 구조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세대 교체의 실체는 빛을 더 많이, 더 안정적으로 만드는 일이고 그 부담이 그대로 값에 실립니다. 이 글은 가격표를 비교하지 않습니다. 같은 2,000억 원이 무엇에 쓰이는지, 그리고 왜 그 항목이 다른 방식으로는 싸질 수 없는지를 봅니다. 장비 한 대에는 무엇이 들어가나 EUV 장비는 해상 컨테이너 두 개 정도 크기에 무게 150~180톤입니다. 단일 기계가 아니라 조립체에 가깝고, 그래서 완성품을 옮기는 일 자체가 별도의 공정이 됩니다. 항목 규모 부품 수 10만 개 이상 협력사 5,000곳 이상, 자재의 약 85%가 외부 조달 배선·체결 케이블 3,000개, 볼트 4만 개, 호스 2km 무게 150~180톤 운송 보잉747 3~4대. High-NA는 컨테이너 250개·트럭 25대·보잉747 7대 기준: 2026년 8월 · ASML 공개 자료 및 아시아경제·업계 자료 종합 여기서 눈여겨볼 숫자는 부품 10만 개가 아니라 협력사 5,000곳입니다. 부품 대부분을 밖에서 사 온다는 뜻이고, 그 부품 상당수는 이 장비 말고는 팔 곳이 없습니다. 수요처가 하나뿐인 부품은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지 않아 개당 단가가 내려가지 않습니다. 광원 모듈은 왜 가장 비싼가 13.5나노미터 파장의 빛은 램프를 켜서 얻...

이스라엘 건국 1948 | 유엔이 56 대 43으로 나눈 결과입니다

이스라엘은 1948년 5월 14일 다비드 벤구리온의 선포로 건국됐습니다. 근거는 그 6개월 전인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 결의 181호였습니다. 이 분할안은 팔레스타인 전 지역의 56.47%를 유대 국가에, 42.88%를 아랍 국가에, 0.65%를 예루살렘 국제 지구에 배정했습니다. 당시 유대인은 인구의 약 3분의 1이었고 토지의 7% 안팎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1947년 유엔 결의 181호의 팔레스타인 분할 비율과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스라엘 건국이 왜 지금 검색되나

지금 벌어지는 일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이스라엘과 이란, 그리고 주변국들의 대립은 모두 1948년에 정해진 국경과 그 뒤에 벌어진 전쟁들에서 이어집니다. 사건 보도만 읽어서는 왜 이 지역이 이런 구도가 됐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이 글은 건국이라는 하루가 아니라 그 앞뒤 30년을 정리합니다. 무엇이 약속됐고, 유엔이 어떤 기준으로 땅을 나눴으며, 왜 양쪽의 반응이 정반대였는지를 다룹니다. 평가는 지금도 갈리므로 사실과 양측 주장을 함께 적었습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시온주의 운동은 19세기 말에 시작됐습니다. 유럽에서 반유대주의 박해가 이어지자 유대인 국가를 세우자는 구상이 나왔고, 언론인 테오도르 헤르츨을 중심으로 1890년대부터 구체화됐습니다.

시점 내용
1890년대 헤르츨 중심으로 시온주의 운동 조직화
1917년 밸푸어 선언. 영국이 유대인 민족적 향토 건설에 협조 표명
1920년대~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 시작. 유대인 이주 증가
1930년대 이주 급증에 아랍인 반발. 영국이 이주 제한 시도
1945년 2차대전 종전. 홀로코스트 생존자 이주 문제 대두
1947년 9월 유엔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UNSCOP)가 분할안 제시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 결의 181호 채택
1948년 5월 14일 벤구리온이 이스라엘 건국 선포
1948년 5월 15일 제1차 중동전쟁 발발

정리 기준: 2026년 7월 31일

결정적인 전환점은 2차대전 직후였습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 4,500명을 태운 배가 영국군에 입국을 거부당하고 독일의 영국 점령지로 강제 이송된 사건이 국제적 관심을 끌었습니다. 유럽 유대인들의 처지에 대한 동정 여론이 커졌고, 난민 문제를 감당하기 어려워진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엔으로 넘겼습니다.

영국의 위치가 애매했다는 점도 짚어야 합니다. 위임통치 기간 내내 유대인 이주를 묵인하다가 아랍인 반발이 커지자 제한하려 했고, 그 결과 양쪽 모두의 불만을 샀습니다. 팔레스타인 주둔 영국군을 겨냥한 유대인 무장 조직의 공격까지 벌어졌습니다.

유엔은 땅을 어떻게 나눴나

결의 181호의 배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구분 배정 면적 당시 인구 비중 당시 토지 소유
유대 국가 56.47% 약 3분의 1 약 6.6~7%
아랍 국가 42.88% 약 3분의 2 약 87.5%
예루살렘 국제 지구 0.65% 유엔 관할

토지 소유 비율은 1945년경 팔레스타인 전 영토 26,323㎢ 기준이며 나머지 5.9%는 공유지였습니다

예루살렘은 세 종교의 성지가 겹치는 곳이라 어느 쪽에도 주지 않고 유엔이 관리하는 중립 지대로 설정했습니다.

이 비율이 이 사안의 핵심 쟁점입니다. 인구의 3분의 1이고 토지의 7% 안팎을 소유한 쪽에 전체의 56%가 배정됐습니다. 배정된 지역에는 올리브 농장과 곡창 지대 같은 경작 가능한 비옥한 땅이 다수 포함됐습니다.

분할안을 지지한 쪽의 논리는 달랐습니다. 유대인 인구가 계속 유입되는 추세를 감안해야 하고, 배정 면적의 상당 부분이 네게브 사막이라 실사용 가능한 땅으로 보면 격차가 줄어들며, 홀로코스트 직후 유대인 국가 수립은 국제사회의 도의적 책무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유엔이라는 국제기구의 결의라는 절차적 정당성을 근거로 들었습니다.

결과는 정반대의 반응이었습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이를 받아들였고 아랍인들은 거부했습니다.

미국과 소련이 함께 찬성했다

냉전 초기임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대목입니다. 1947년 11월 29일 총회에서 소련 대표 안드레이 그로미코가 분할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고, 이는 당시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소련은 건국 선포 사흘 뒤 이스라엘을 최초로 법적 승인한 나라이기도 합니다. 스탈린은 체코슬로바키아를 통한 무기 공급을 명령했고, 그 무기가 유대인 무장 조직 하가나에 들어갔습니다. 하가나는 이후 이스라엘 방위군의 주력이 됐습니다.

소련의 계산은 중동에서 영국의 영향력을 밀어내는 것이었다는 해석이 일반적입니다. 실제로 이 관계는 오래가지 않았고 소련은 곧 아랍 국가들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주요 후원국이 미국으로 굳어진 것은 그 이후입니다.

이 시기에는 이란도 지금과 관계가 달랐습니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전까지 이란은 이스라엘에 석유를 공급하던 사이였고, 그 경위는 이란 이스라엘 전쟁 이유 편에 정리했습니다.

건국 다음 날 무슨 일이 있었나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5월 14일 건국 선포에 이어 다음 날 주변 아랍 국가들이 개입하면서 제1차 중동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결과는 분할안과 달랐습니다. 이스라엘이 승리하면서 실제 지배 영역이 181호가 배정한 56%를 넘어섰습니다. 예루살렘은 유엔 관할 중립 지대라는 구상이 무산되고 이스라엘과 요르단이 동서로 나눠 관리하게 됐습니다. 결의 181호는 채택된 지 반년 만에 사실상 효력을 잃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아랍인 다수가 이 과정에서 거주지를 떠났습니다. 이 사건은 아랍어로 대재앙을 뜻하는 나크바로 불리며, 떠난 이유와 성격에 대한 해석은 지금도 크게 갈립니다. 이때 발생한 난민 문제는 현재까지 해결되지 않은 쟁점으로 남아 있습니다.

즉 지금의 지도는 1947년 분할안이 아니라 1948년 전쟁의 결과로 만들어졌고, 이후 1967년 전쟁에서 다시 크게 바뀝니다.

한국에는 무엇이 걸려 있나

직접적인 이해관계보다는 이해의 문제입니다. 중동 관련 뉴스는 이 배경을 전제하고 쓰이므로 배경을 모르면 사건의 의미를 읽기 어렵습니다.

실질적으로는 에너지와 항로로 닿습니다. 이 지역의 긴장은 홍해와 호르무즈 통항에 영향을 주고, 그것이 한국의 원유 도입 단가로 이어집니다. 한국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 모두와 외교 관계를 두고 있으며 어느 한쪽 편에 서지 않는 입장을 유지해 왔습니다.

확인할 자료는 유엔 총회 결의 181호 원문과 각국 외교부의 공식 입장문입니다. 이 주제는 서술하는 쪽의 관점에 따라 같은 사실이 다르게 배치되므로 1차 자료를 함께 보시는 편이 안전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이스라엘 건국일은 언제입니까

1948년 5월 14일입니다. 다비드 벤구리온이 건국을 선포했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의 독립기념일은 히브리력 기준이라 양력 날짜가 해마다 달라집니다.

유엔 분할안은 어떤 비율이었습니까

유대 국가 56.47%, 아랍 국가 42.88%, 예루살렘 국제 지구 0.65%였습니다.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 결의 181호로 채택됐습니다.

아랍 측은 왜 거부했습니까

인구의 3분의 1이고 토지의 7% 안팎을 소유한 쪽에 전체의 56%가 배정됐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습니다. 배정 지역에 비옥한 경작지가 다수 포함된 점도 반발 이유였습니다.

영국은 왜 팔레스타인에서 물러났습니까

2차대전 이후 재건 부담이 큰 상황에서 유대인과 아랍인 양측의 불만과 무장 공격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결국 문제를 유엔에 넘기고 위임통치를 종료했습니다.

소련도 이스라엘 건국을 지지했습니까

지지했습니다. 1947년 총회에서 분할을 찬성했고 건국 선포 사흘 뒤 최초로 법적 승인했으며 체코슬로바키아를 통해 무기를 공급했습니다. 다만 이 관계는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정리

이스라엘 건국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하루에 생긴 나라가 아닙니다. 19세기 말 시온주의에서 시작해 영국 위임통치와 2차대전을 거쳐 1947년 유엔 결의로 이어진 30여 년의 끝이 1948년 5월 14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의가 정한 지도는 반년 만에 무의미해졌습니다. 지금의 국경은 분할안이 아니라 1948년과 1967년 두 차례 전쟁의 결과입니다. 이 사안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갈리며, 이 글은 확인된 사실과 양측 주장을 함께 적는 데 목적을 두었습니다.


이 글은 2026년 7월 31일 기준으로 확인한 내용입니다.
참고: 유엔 총회 결의 181호 ·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관 · 계간 외교 · 관련 학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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